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토 도모사부로 (문단 편집) == 생애 == 1861년 [[히로시마]]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청일전쟁]]에 순양함 "요시노" 의 포술장으로서 종군하여 황해 해전에서 활약하였고, [[러일전쟁]] 때에는 연합함대 참모장 겸 제1함대 참모장으로서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였다. 해전 당시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안전이 보장된 사령탑에 들어가지 않고 함교 위에서 군인들을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신의 주특기인 포술을 활용하고 러시아 전함을 젹침하는 전술과 2인자로써 부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성과로 승리를 쟁취한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해군 군령부장이자 동기인 시마무라 하야오와 함께 '[[88함대]]' 구축에도 앞장 선 인물. 그 후에는 해군차관, 구레 진수부 사령장관, 제1함대 사령장관을 거쳐 1915년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해군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타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 등 다섯내각(자신의 총리대신 시절 내각까지 포함)에서 계속 해군대신직을 유임하였다. [[사이토 마코토]]에 이어 해군대신 재임 기간은 역대 2위를 기록하고 해군대신으로 근무하던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가 1909년 군령부장 은퇴 이후 해군에 큰 어른으로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쓸데없는 아집을 부리기 시작할 때 적절히 고집을 꺾고, 제압하여 실리를 찾았다. 그리고 뒤에 기술하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가토 히로하루 등 후배 파벌 즉 후일 함대파의 말도 안되는 주장을 자신이 해군에서 쌓아온 실력과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현실성 없는 주장을 제압하며 당시 [[해군성]] 최고 1인자로서 권력을 충분히 발휘한 마지막 해군대신으로 평가받는다. 해군력 군축을 위한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워싱턴 회의]]에는 일본 수석전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회담 직전 [[하라 다카시]] 총리는 "국내의 일은 내가 정리하겠습니다, 가토 대신은 워싱턴에서 마음 껏 회담에 임해 주세요."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참석 당시 각국 기자단에게 '[[사망 플래그|촛불]]'이라는 별명을 보일 정도로 처음에는 무시당했지만 미국이 주축이 된 군축 방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히려 "위기의 세계를 구하는 밝은 촛불"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또한, 워싱턴 회의 2차 총회에서 국방은 군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민간의 공업력과 무역 등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음으로 군비만 늘리는건 회의에 참가한 모든 국가를 파국으로 향하는 길임을 제대로 파악한 연설을 통해 참가국 군축에 방향으로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이로인해 일본 자국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등 열강에서 정치와 경제 모두 잘 아는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가토는 [[러일전쟁]]의 참전 경험으로 전쟁으로 인한 재정문제가 발생 할 뿐만 아니라 여러 피해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군비 부분에 있어 절대 이길 수 없는 미국, 영국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일본의 국력을 기르는 동안 외교 수단으로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해군대신으로 재임중이던 1922년 6월 22일 [[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21.jpg]]}}} || || 총리대신 취임 후 || 하라의 후임 [[다카하시 고레키요]] 총리는 1922년 내각불일치를 이유로 총사퇴를 결의했다. 본디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사임한 것은 개각을 단행코자 벌인 일련의 고육지책이었으니, 즉 하라의 사후 정우회의 총재와 총리대신을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다카하시의 천성이 정치 체질이 아니었던 까닭에 당내 장악력도 떨어졌고 내각 내에도 나카하시 도쿠고로와 모토다 하지메 등 반대편이 많았던 것이다. 이 둘은 특히 다카하시가 추진했던 내각 개편에 반대하였는데 이에 다카하시는 내각 총사퇴를 하여 이런 반대파들을 내쫓고 내각을 새로 구성하여 당시 위태로웠던 다카하시 자신의 당내 장악력을 확고히 할 생각이었다. 자기가 다시 총리로 뽑힐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 총리이자 원로인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다카하시 내각이 사임하자 [[기요우라 게이고]] 추밀원 의장과 의논하고 당시 몸져 누워있던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의 양해를 얻어 다카하시의 계산과는 반대로 가토를 추천했다. 군축이 이루어지는 도중에 일본 해군의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해군의 '원맨 대신'이라 불리고 있는 신망이 높았던 가토가 적임자였고, 워싱턴 회의의 수습에도 잘 맞는 인물이었기에 원로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았다. 정우회는 당초의 계산과는 다르게 가토에게 총리직이 돌아가자 반대공작을 펼쳤고, 가토 본인도 끝끝내 고사하여 마쓰카타는 총리 대신 후보 2순위였던 [[가토 다카아키]] 헌정회 총재와 접촉하게 된다. 가토가 조각을 못하게 막으면 총리직은 결국 다시 다카하시에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정우회 측은 이 소식에 당황하였고, 헌정회에게 정권을 줄 수 없다고 하여 황급히 가토 해군대신(해상)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상황이 급변하자 마쓰카타도 다시 가토 해상과 조각논의를 재개하여 결국 가토 해상이 정권을 잡게 된다. 다 된 죽을 못 먹게 된 가토 다카아키는 이 사건 이후 원로의 간택받기를 포기하고 의회주의, 이른바 헌정의 상도를 고집하게 된다. 원로들의 지지로 출범한 내각이었기에 국무대신들은 주로 [[귀족원(일본)|귀족원]] 출신, 특히 연구회 소속 의원들로 구성되었고, 정당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실무는 차관을 중심으로 내각을 꾸려나갔으며, '사무관 내각'이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경제적 불황 속에서 워싱턴 회의를 이행하는 내각의 특성상 행정과 재정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해군의 경우 '88함대' 구축도 포기하고 전함 14척을 폐기, 건조되던 전함 6척도 생산을 중지했다. 육군도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의 이름을 딴 '야마나시 군축'에 의거, 1922년 8월, 1923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군인들과 군수업 노동자들도 정리해고 되었으며, 병역 단축 역시 시행되었다. 당시 일본에 부담을 주던 시베리아 출병도 기한에 맞춰 철군을 완료시켰다. 군 출신 총리여서 이러한 계획을 정댱 정치인보다 원할히 진행할 수 있었고 이 당시 일본의 재정 부담은 대폭 줄어들어 군비 억제를 통한 재정적 개혁에도 성공했다. 여러 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는 것도 이미 계획이 짜여져 있었기에 적절히 실무를 처리하는 차관급 대신으로도 유지가 가능했다. 군 출신 총리의 내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법이 통과되어 사법과 무관한 민간인들도 재판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중의원 선거법 조사회를 설치하는 등 보통선거를 원하는 여론을 경청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불법화되었던 [[일본 공산당|공산당]]이 결성되자 공산당원들을 무차별로 체포했다. 그러나 가토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 문 너머로 대화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내각 성립을 비롯, 워싱턴 회의 때도 '[[촛불|잔촉 내각]]'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얼굴빛이 창백했다고 한다. 1922년 11월 대장암 진단을 받은 후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그 해 12월의 제국 의회 개원식에도 참석 못했고, 1923년 8월 24일에 62세로 사망한다. 그가 사망한 뒤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총리 권한대행을 맡았으며, 연구회를 중심으로 오카노 게이지로 사법대신을 총리로 옹립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불발로 끝났다. 시행착오 끝에 [[야마모토 곤노효에]] 전 총리가 한 번 더 총리직을 맡게 되었으나, 바로 이 공백기간 중에 [[관동대지진|대참사]]가 발생했고, 총리의 공백으로 인해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재해 수습이 빨랐거나 조선인 대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뛰어난 능력과 개념에 비해 건강이 받쳐주지 못한 비운의 정치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